CJK와 함께하는 미학 오디세이 1, 2, 3권 리뷰

2016년 12월 11일 일요일


사진출처: http://hulog.co.kr/306


진중권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?
주위 친구들에게 "진중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냐?"라고 물으면
모두들 "응 당연하지!"라고 대답하지만 정작 뭐하는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다.
나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. 며칠 전 우연히 도서관에서 '미학 오디세이'라는 책을 집어들기 전까지는.

이 사람은 알고보니 미술 쪽 교수였다. 특히 미학(미술철학) 전공이었다.
경력을 보니 예전에 방송에 몇 번 나왔고 정치 관련한 발언을 몇 번 해서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.

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, 내가 이 사람의 책을 정말 재밌게 읽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.
(더불어 책 표지에 써있는 '유쾌한 미학자 CJK'라는 말도 부정할 수 없었다.)
이 책은 1, 2, 3권에 걸쳐 고대부터 현대까지 미술철학에 대해 소개하고 같이 고민하고 있다.
책 어휘 자체는 분명 어려운데 읽다보면 저절로 이해가 되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으며
중간중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와 다른 미술가들을 비평하고 철학을 비판한다.
'유쾌한 미학자'라는 타이틀답게 책에서는 수시로 풍자나 패러디가 나와 글 자체가 재밌다.
개인적인 생각으로 진중권 교수는 소설가의 기질도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.
분명 어려운 글을 읽고 있는데 마치 소설처럼 써놓아서 술술 읽힌다.
또한 이과 출신인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표현을 많이 쓰고는 한다. 문학적인 표현들 말이다.
이 책을 보면서 '이런 어려운 내용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거구나..'라고 생각했다.
이 분이 철학자가 아닌 것이 아쉬울 뿐이다.(개인적으로 쉬운 철학 책을 찾고 있음.)
책 중간에 갑자기 딴 소리를 할 때도 있는데, 그 때는 그냥 시원스레 넘어가주면 된다.

미학 관련 책은 처음 봤지만 이 책만큼 잘 쓴 책도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든다.
나는 대학교 때 예술사 수업을 맛보기로 들으면서 나름 내 세계관에 '미술철학' 분야를 포함시켰다.
그 당시 내 나름 생각으로는 잘 정립했다고 한 것이 있다.
내 생각에 미술이란 결국 '철학팔이'다.
(여기서 철학이란 '철학계, 과학계, 미술사학계에서 논해오던 주제 및 기존에서 탈피하는 새로운 사상으로서 철학계에서 인정받는 주제'이다.)
사람들은 미술을 하면서 나름대로 자신의 철학을 담는다.
그리고 이를 보는 사람들, 그리고 구매자들은 또 본인 나름대로 작품을 해석한다.
이 해석은 작가와 동일한 철학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.
미술가들과 구매자들은 이 철학에 어느정도의 가치를 매긴다. 이 가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.
예를 들어 인상주의가 높은 평가를 받는 시대에는 모네의 작품에 더 높은 가치와 값이 부여될 것이다.
결국 미술작품을 파는 행위, 또는 남에게 보여주는 행위는 통틀어서 '철학팔이'로 통일된다.

내 머릿속에서 미술은 이 정도로 사유를 끝냈었는데 미술가들에게는 미학이 보통 문제가 아닌 모양이었다.
책을 보니 역사 속에서 많은 미술가들이 기존의 통념을 깨기 위해 노력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.
미학에 대해서는 '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'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적용해야하지 않을까, 라고 생각했다.


이 책을 읽으면서 진중권 교수가 '확실히 문과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'라고 느낀 것은 2권 에필로그를 본 후였다.
여기에 짧게 적어본다.



 에필로그. 다시 별밭을 우러르며.
 인천에 있는 결핵 요양원을 몰래 빠져나온 후 5일 동안 친구가 뭘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.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. 하얀 재로 변한 그를 누이들은 차마 강물에 뿌리지 못하고 어머니 산소 옆에 묻기로 했다. 어머니 산소에 도착했을 때 누이들은 그 앞에서 빈 소주병을 볼 수 있었다. 거기엔 시들어버린 들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. 그 꽃이 싱싱했을 때엔 친구도 아직 살아있었으리라.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퍽이나 그 친구답다고 생각했다.
 이 책의 몇 부분은 그를 기념한다. 빛의 화가 렘브란트, 그리고 <플란다스의 개>에 나오는 그림이 루벤스의 그림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그를 통해서였으니까. 아마 백마에 있는 화사랑 옆 기찻길 위에서였을 거다. 그러니까 벌써 12년 전, 그때 우리는 강의실보다 더 열심히 거기를 드나들었었다. 드럼통을 잘라 만든 벽난로에 테이블 두 개, 그리고 마음대로 판을 골라 음악을 들을 수 있는 조그만 스테레오 하나..
 친구의 기억과 결부된 또 한 사람의 화가가 있다. 반 고흐. 중학교 1학년.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였다. 길거리에서 우리는 목각으로 된 구두를 두 개 사서, 거기에 각자 이름을 쓴 뒤, 하나씩 나누어 가졌었다. 그 구두를 보고 '얘들이 사춘긴가 봐' 하며 막 웃는 누나가 얼마나 얄미웠던지. 머리가 큰 다음엔 우리도 가끔 그 얘기를 하며 웃곤 했다. 하지만 그때까지도 우리는 그 목각의 원작이 반 고흐의 <구두>라는 사실을 몰랐었다.
 어느 날 화사랑 옆 문산 가는 철로에 걸터앉아서, 친구는 밤하늘을 가리키며 고흐의 그림 같지 않냐고 했다. 지금 생각해보건대, 친구가 얘기한 그 그림은 <별밤(Sternnacht)>이었을 거다. 별들이 소용돌이치며 휘감아도는 밤하늘. 그때 내가 그 그림을 알고 있었는지 어쩐지 기억이 안난다. 하지만 어쨌든 그때 밤하늘은 정말로 그렇게 느껴졌었다. 마음속에 까닭 모를 답답함을 가득 담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. 그때는 뭐가 그렇게 답답했던지... 그리고 지금은 왜 이렇게 답답한 건지...


1994년 2월.





에필로그를 보고 나는 왜 이런 친구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. 물론 친구가 나보다 먼저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말이다.




글 출처 : http://blog.naver.com/kush009/220871973470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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